한국 소개 - 역사

역사의 태동(선사시대~고조선)

 
01-bg.jpg
 

한국 역사는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시작됐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도구와 뗀석기를 사용했던 구석기시대인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평안남도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 등이 있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사냥감을 찾아다니거나 채집하며 생활했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 전 시작되었다. 농경이 시작돼 좁쌀을 비롯한 잡곡류를 경작했으며 점차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씨족사회를 이뤘다. 이들은 돌을 갈아서 다양한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였다. 이 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서울 암사동, 평양 남경, 김해 수가리 등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주먹도끼 -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다기능 연모

한반도에는 기원전 10세기경, 만주 지역에는 기원전 15세기경 청동기시대가 시작됐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일대와 한반도 전역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 청동기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했으며, 강한 족장이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국가로 발전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중심세력은 하느님을 믿는 부족과 곰을 숭상하는 부족이었다. 두 부족이 연합해 단군왕검을 추대했는데, 그는 제사장과 정치지도자를 겸했다. 고조선은 중국 요령 지역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뤘으며, 기원전 3세기에는 부왕, 준왕 등 강력한 왕이 세습했다. 왕 아래에는 상, 대부, 장군 등 통치체계를 갖췄다.

빗살무늬 토기 -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지인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뾰족바닥의 토기

기원전 3세기 말 중국은 진나라와 한나라가 교체되는 격변의 시기를 맞았다. 이때 많은 유민과 이민이 고조선으로 남하했으며, 이들의 지도자 위만이 기원전 194년 왕위에 오르면서 고조선은 팽창했다. 이때 철기문화를 받아들였고,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군사력도 강화했다. 또한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한반도 세력과 중국의 교역을 중개하면서 이익을 독점하려고 했다. 이는 고조선과 중국 한나라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한나라는 대규모 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침공했다. 전쟁 초기에 고조선은 대승을 거두었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1년간의 전쟁 끝에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고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다.

고인돌(Dolmen)

피라미드, 만리장성, 스톤헨지 등과 같은 고대의 유적을 흔히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유적이 한반도에도 존재한다. 바로 고인돌이다. 세계 전체 고인돌의 절반에 가까운 4만 여 기가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은 사람의 뼈, 석기, 옥, 청동 제품 등 다양한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그러나 축조 당시의 기술 등에 대해 추론할 뿐, 아직 풀리지 않은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북쪽에서도 기반형 고인돌이, 남쪽에서도 탁자형 고인돌이 다수 발견되어 현재는 탁자식과 기반식으로 구분한다. 두 형식 이외에 학자에 따라 몇 개의 다른 형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강화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한국 고인돌은 분포 지역에 따라 한강 북쪽 지역의 북방식과 남쪽 지역의 남방식으로 나누고, 북방식을 탁자식, 남방식을 기반식으로 구분했다.

전라남도 순천에 조성된 고인돌 공원

고인돌을 흔히 무덤이라고 말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12세기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는 고인돌을 감상하고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세상 사람이 고인돌을 옛 성인이 고여 놓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신기한 기술이다.’ 20세기초 미국인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고인돌은 무덤과 상관없으며, 땅의 신에 대한 제사용으로 만들었다고 추정했다. 한국 민속학자 손진태도 한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거인인 마고할머니(혹은 마귀할멈)가 살던 집이 고인돌이라는 민담을 소개하며 제단이라고 주장했다.

고인돌은 만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분포돼 있으며, 수천 년 동안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한국인과 삶을 함께해오다 기원전 어느 시기에 축조가 끊겼다. 따라서 한반도에 고인돌이 밀집된 이유, 한국 고인돌이 유럽 각국과 인도의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유네스코가 2000년 강화, 화순, 고창 지역의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사실은 한국 고인돌의 인류문화사적 중요성에 대한 지구촌의 관심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국 소개 - 역사

삼국과 여러 나라의 탄생

 
02-bg.jpg
 

 고조선 말기,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새로운 부족국가가 속속 탄생했다. 부여는 만주 지린 지역을 중심으로 쑹화강 일대의 평야지대에서 발흥했으며, 농경과 목축생활을 하면서 말과 모피 등 특산물을 생산했다. 1세기 초에는 왕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대외관계를 전개했으나, 3세기 말 고구려에 편입됐다. 부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죄수를 풀어주는 영고라는 축제행사가 있었는데 매년 12월에 열렸다. 부여는 지역연맹 단계에서 망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세력은 부여의 혈통임을 자처하는 등 한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에서 남하한 고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기록됐다

광개토대왕비(고구려, 5세기)-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은 오늘날 만주, 연해주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다. 서기 414년 그의 아들 장수왕은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린성 지안현에 비를 세웠다. 높이 6.39m, 무게 37t에 이르는 규모로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고구려 건국과정과 대외 정복사업 등이 기록돼 있다.

고구려는 백두산과 압록강 일대에서 크게 번성했으며, 건국 초기부터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압록강 주변의 국내성(통구)으로 도읍을 옮겼다. 정복전쟁을 활발히 벌였는데, 중국 한나라 세력을 공략하여 요동 지역으로 통치영역을 확장했으며, 동쪽으로는 한반도 북쪽으로 진출하는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지배영역으로 하는 강국으로 발전했다.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일대에는 옥저와 동예라는 작은 나라들이 있었으나, 변방에 치우쳐 발전이 늦었다. 해산물이 풍부한 옥저는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물로 바쳤다. 동예는 매년 10월 무천이란 제천행사를 열어 춤과 노래로 화합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실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말인 과하마가 유명했다. 이 두 나라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복속됐다

고조선의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을 비롯한 군소국가들이 발전했다. 경기, 충청, 전라 지역에 분포한 마한은 54개 소국으로 이뤄졌으며, 총 10만 호에 이르는 국가였다. 김해와 마산을 중심으로 변한이란 나라가 있었고, 대구와 경주 중심으로는 진한이 있었다. 각각 4만~5만 호에 이르는 작은 국가였다. 삼한에서는 5월 수릿날과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날마다 술과 음식, 노래와 춤을 즐겼다. 철기문화의 확산과 농경기술의 발전으로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 강력한 국가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다.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먼저 국가체제를 정비했으며, 1세기 후반부터 영토를 넓히고, 2세기 후반에 이르러는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 4세기 초반 미천왕은 중국 한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무용총 수렵도(고구려, 5세기) -고구려인의 역동적인 사냥 모습을 보여준다.

소수림왕은 372년에 불교를 도입하고 율령을 공포했으며,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립하는 등 국가제도와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그의 아들 광개토대왕은 거란, 숙신, 동부여를 몰아내고 만주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그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수많은 성을 점령했으며,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한반도 남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백제금동대향로(백제, 6세기) -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 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주는 귀중한 작품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부여-고구려계 유민과 이민 세력이 결합해 기원전 18년에 세운 국가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정치체제를 정비했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은 마한 지역을 정복하고 전라도 남해안까지 진출했다.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치했으며, 남으로는 가야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했다. 당시 백제가 지배한 땅은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신라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했다. 경주 지역의 토착세력 및 유민과 이민 집단이 결합해 기원전 57년 국가로 성장했다. 박, 석, 김 씨 성을 쓰는 인물이 교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4세기경에는 낙동강 동쪽을 거의 차지했다. 내물왕은 신라를 침공한 왜를 몰아내기 위해 고구려 군대를 자국 내에 주둔하게 했으며, 고구려를 통해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가야의 금관 - 경상북도 고령에서 출퇴된 것으로 세움장식을 이용하여 관테에 금실로 연결하였으며 돌기를 달아 굽은 옥을 걸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금관가야를 맹주로 하는 가야연맹이 출현했다. 철기문화를 가졌던 연맹은 낙동강 유역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가야의 작은 나라들은 일찍이 벼농사를 지어 농경문화를 꽃피웠으며 풍부한 철과 해상교통로를 활용해 낙랑, 왜와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5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은 강력한 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갖추고 팽창을 도모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는 등 한강 지역은 물론, 죽령(오늘날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영주 일대)에서 경기도 남양면에 이르는 선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 같은 팽창으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광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됐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자 475년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국력을 강화하여 잃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고 고구려에 맞섰다. 무령왕은 지방통제를 강화하면서 중흥의 기반을 마련했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수도를 사비(부여)로 다시 옮기고 체제를 정비하면서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했다.

신라는 6세기 초 지증왕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정치제도를 정비했으며 수도와 행정구역을 정리했다. 그는 특히 512년 우산국을 정복해 영토에 편입했다. 우산국은 현재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다. 법흥왕은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불교 공인을 통해 통치체제를 안정시켰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등 중앙집권국가로서 체제를 정비했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고,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했으며,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영토를 넓혔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1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특히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612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수의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는데, 이를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국력이 소모된 수나라를 618년에 멸망시킨 당나라도 고구려를 수차례 침략했으나 실패했다.

고구려가 수와 당의 침입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는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당과 손을 잡고 백제를 침공했다.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백제결사대를 격파하고 백제의 사비성에 진출했다. 한편 당나라 군대는 금강하구로 침입했다. 신라와 당의 협공을 받은 백제는 660년에 항복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동북아시아의 최강국가인 고구려를 공격했다. 중국의 두 제국과 오랜 전쟁을 치러 국력이 소모돼 있던 터라 고구려 또한 668년에 멸망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지역에는 안동도호부 등을 만들어 직접 통치하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지배하려고 획책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맞서 전쟁을 벌여, 금강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격파해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도 몰아냄으로써 676년 삼국을 통일했다.

 
 
 

한국 소개 - 역사

남북국 시대:통일신라와 발해

 
03-bg.jpg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신라의 영토와 인구는 크게 늘고, 경제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한때 전쟁을 벌였던 신라와 당은 우호관계를 회복했고, 두 나라의 상인, 승려, 유학생들은 활발히 왕래했다. 무역도 활발해져서 신라는 당에 금·은 세공품, 인삼 등을 수출하고, 서적, 도자기, 비단, 옷, 공예품 등을 수입했다. 또한 비단길과 해상을 통해 서역의 문물과 상인들이 신라에 오기도 했다.

신라의 주요 항구로는 울산항과 당항성(경기도 화성)이 있었으며, 이곳을 통해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9세기초 신라의 장군 장보고는 청해진(전라남도 완도)이라는 해적소탕 기지이자 무역거점을 설치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 거점을 마련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의 당에 대한 저항은 계속됐다. 698년 대조영 등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지린성 동모산 근처에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대립하는 형세가 됐다.

통일신라와 발해(8세기)

발해는 영역을 확장해 옛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무왕 때는 북만주 일대를 장악했으며, 문왕 때는 체제를 정비해 755년경 수도를 상경(흑룡강성 영안현 일대)으로 옮겼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일본에 보낸 문서에도 고구려왕을 뜻하는 ‘고려왕’이라고 표현했다.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릴 만큼 번영했으나 백두산 화산폭발이란 자연재해와 거란의 침략을 받아 926년에 멸망했다

성덕대왕신종 (통일신라, 8세기)- 현존하는 가장 큰 종으로 무게가 18.9t에 달한다.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린다. 오른쪽 사진에서는 신라의 세공기술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소개 - 역사

고려시대

 
04-bg.jpg
 

8세기 후반, 신라는 중앙귀족들 사이의 권력쟁탈전으로 쇠약해졌다.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10세기에는 견훤과 궁예로 대표되는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정권을 세웠다. 892년 견훤은 완산주를 도읍으로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지배하는 후백제를 건국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고려, 12세기) - 비취색의 청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데, 빚는 과정에서 표면에 홈을 파내고 희고 검은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문양을 나타냈다. 이러한 상감기법은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기술에 속한다.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 (고려, 14세기)

901년에는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가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를 장악하고 송악(개성)에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정비한 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태봉으로 바꿨다.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잃은 궁예는 918년 송악의 호족인 왕건에게 쫓겨났다.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고려라고 짓고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고려는 후백제를 공격하는 반면, 신라에는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폈다.

935년 통일신라는 고려에 항복해 전쟁 없이 흡수됐다. 후백제에서는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했으며, 왕건은 936년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했다. 고려는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고 국자감과 향교 등을 세워 수준 높은 교육을 실시했다. 불교도 번성하여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토속신앙과 융합된 연등회, 팔관회도 열려 고려는 종교에서 포용성을 보여줬다.

고려는 중국의 송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와도 활발히 교류했다. 수도인 개성에 들어가는 관문 벽란도에는 송, 서역과 아라비아, 동남아시아, 일본의 상인들이 빈번히 드나들었다. 송 상인들은 비단과 약재, 고려 상인들은 삼베와 인삼 등을 팔았다. 아랍 지역에선 상아, 수정, 호박 등 보석이 들어왔다. 대한민국을 ‘코리아’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바로 이 ‘고려’에서 비롯됐다.

고려시대는 찬란한 문화를 자랑한다. 비취색 도자기 표면을 파고 무늬를 넣은 ‘상감’기법의 상감청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예술품이다. 8만 1,258장의 나무판에 불교경전을 조각해 종이에 인쇄한 팔만대장경은 이 시대 불교문화의 정수이자 세계 목판인쇄의 최고봉이다. 또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도 고려인이 발명했다. 한국 역사기록에 따르면, 고려가 금속인쇄 기술을 발명한 시기는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선다. 현존하는 인쇄물로는 1377년에 나온 ‘직지’라는 책이 있다. 1455년에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보다 78년이나 앞선 이 책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고려(11세기)

몽골과의 전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변했다. 유목민인 몽골족이 통일 국가를 이루면서 중국의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몽골은 1231년 1차 침입 이래 7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군인은 물론 백성과 노비 등 일반 민중까지 합세하여 몽골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1259년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이뤄졌으며, 원나라는 고려 왕국의 존속 보장과 몽골군의 즉각 철수 등 고려 측 6개 요구를 모두 수락했다. 이는 고려를 직할 통치하려던 몽골에 끈질기게 항전한 결과였다.

강화는 성립됐으나, 몽골에 항쟁하던 군대인 삼별초는 황제를 옹립하고, 진도를 거점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며 전쟁을 계속했으며, 진도가 함락되자 제주도로 옮겨가 1273년까지 저항했다.

무려 42년간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인 몽골의 군대와 맞선 고려의 저항은 강인한 투쟁정신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생은 피폐해졌으며, 황룡사 9층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몽골군에게 파괴됐다.

 
 
 

한국 소개 - 역사

조선시대

 
05-bg.jpg
 

14세기 말 고려는 권문세족의 과다한 권력집중, 홍건족과 왜구의 침입 등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홍건족과 왜구 격퇴로 민심을 얻은 장군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고려의왕을 내쫓고, 이성계를 새 왕조의 첫 왕인 태조로 추대했다. 태조는 즉위한 후 국호를 조선으로 바꿨으며,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한양(현재 서울)을 수도로 정하고 도성과 경복궁, 종묘, 도로, 시장 등을 건설하도록 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한강을 통해서 국내외 교류가 가능했으니 수도로서는 최적지였다.

태조의 아들 태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호패법을 시행해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고, 국가행정을 담당한 육조(이부, 호부, 예부, 병부, 공부, 형부)가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정치, 사회, 문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정책을 개발하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연구하게 했다. 세조~성종 시기에는 국가의 항구적인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을 편찬했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 왕조의 통치체제는 더욱 안정됐다.

한글창제

한국은 고대 왕조부터 한자를 사용했다. 한자를 빌려 한국어를 표기하는 이두, 향찰을 쓰기도 했으나,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가 없어서 쉽게 배우고 쓸 문자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를 헤아려 세종은 1443년 한글을 창제하여 1446년 반포했다. 한글은 발성 기관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문자로서, 정부와 국민 간의 의사소통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후, 한국이 문화국가로서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학기술의 발달

조선시대에는 과학기술도 괄목할 만큼 발달했다.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 등이 만들어졌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가 제작돼 강수량을 측정했으며 토지를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데 인지의와 규형을 활용하기도 했다.

태조 때는 고구려시대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 세종 때는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바탕으로 칠정산이 만들어졌다. 의학 분야도 풍토에 걸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집성방》, 의료 대백과인 《의방유취》 등이 편찬됐다. 활자 인쇄술도 발달하여 금속활자인 계미자(태종), 갑인자(세종)가 개발돼 수많은 서적이 인쇄 되었다.

조선(15세기)

1. 양부일구(조선, 17~18세기) - 시간과 계절에 따른 해 그림자의 변화를 이용한 해시계(왼쪽)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 측우대(조선, 18세기) - 측우기를 올려놓고 측정하던 '대구선화당측우대'(오른쪽)

조선의 대외관계

조선은 건국 초부터 중국의 명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해마다 사절을 교환했으며 문화·경제 교류가 활발했다. 또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 진해, 울산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했으며,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실시했다. 류큐, 시암, 자바 등 아시아 여러 국가와 교류를 했다.

공예기술의 발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공예품 가운데 하나는 도자기이다. 왕실이나 관청에서는 분청사기나 백자를 널리 사용했다. 청자에 백토의 분을 칠한 소박하고 안정된 모습의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에 널리 사용됐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혁신을 거듭해 16세기경에는 세련된 백자를 만드는 데까지 발달했다. 고려의 전통을 이어 깨끗하고 담백한 모습의 조선백자는 선비문화의 취향과 어우러져 널리 이용됐다.

백자 매화 대나무 새무늬 항아리(조선, 15세기) - 한국적인 정서가 돋보이는 대나무와 새, 매화나무를 세련되게 표현한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임진왜란

조선을 건국한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일본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일본이 더 많은 교역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삼포왜란(1510년), 을묘왜변(1555년) 등을 일으켜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20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는 제후들의 힘을 분산하고 통치의 안정을 위해 20만 대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2차례에 걸쳐 계속된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조선의 왕이 의주로 피란하여 명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가운데 일본군은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침략했다.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조선 최고의 명장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연승을 거듭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켜 일본군의 보급선을 차단함으로써 일본군의 기세를 꺾었다. 더구나 1597년 일본이 재차 침입해왔을 때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배로 일본의 133척의 전함과 전투를 벌여 세계 전사에 남을 대승을 거뒀다. 이를 명량해전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 겹치자 철수했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불국사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됐다. 그러나 일본은 약탈해 간 서적, 활자, 그림을 통해 선진적인 학문과 예술을 배웠고, 특히 조선에서 납치해간 도공이 도자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서민문화의 발달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발달하고 서당교육이 보급되면서 서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자 오락문화도 다양화됐다. 한글소설이 보급됐으며 판소리와 탈춤 등 놀이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구체적인 이야기를 창과 사설로 엮어 전달하는 판소리는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광대가 이야기를 더하거나 뺄 수 있고, 관객도 추임새로 함께 즐길 수 있어 대표적인 서민문화로 발전했다. 19세기 후반, 신재효는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했다. 오늘날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이 전해지는데 이를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고 한다. 탈놀이, 산대놀이 등 가면극도 민중오락으로 인기를 끌었다.

산대놀이 - 전통 민속놀이이자 무용으로 놀이꾼들이 탈을 쓰고 재담, 춤, 노래, 연기를 하며 벌이는 일종의 연극이다.

 
 
 

한국 소개 - 역사

조선의 멸망, 일제의 한국 강점

 
06-bg.jpg
 

18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서구에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거대한 기업도 탄생했다. 서구 제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 해외로 진출해 식민지를 확장했다. 19세기 중엽, 청과 일본을 개항시킨 서구열강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1866년에는 프랑스, 1871년에는 미국의 함대가 나선 공격을 물리쳤다.

그 후에도 압력은 그치지 않았다. 1875년 일본은 군함 운요호를 보내 강화도와 영종도를 공격하고 개방을 요구했다. 일본의 요구, 청의 권유 등으로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를 맺었다. 흔히 강화도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은 군사적 위협 아래 일본의 권리만 인정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이후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의 자원을 경쟁적으로 약탈했다. 이에 맞서 조선은 1897년에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교육과 산업을 육성하는 등 개혁과 개방을 추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청나라, 러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패권을 차지했다. 안중근 의사로 대표되는 애국적인 한국인들은 목숨을 바쳐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으나 허사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의 총검에 굴복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한국 소개 - 역사

독립 투쟁

 
07-bg.jpg
 

일제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조선의 자원을 빼앗고, 고유의 언어와 문자, 이름까지도 바꾸도록 강요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을 제국주의 전쟁의 노동력과 군사력으로 강제 동원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인은 국내외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계속했다. 국내에서는 독립의군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 수많은 항일결사를 조직하여 대항했으며, 중국·러시아·미국 등에서는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또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평화적인 독립시위를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 3.1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되어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전국에서 학생과 시민이 만세시위를 벌인 3·1운동이 그것이다. 이 운동은 만주, 연해주, 미국, 일본, 유럽까지 확산됐다. 3·1운동 이후, 서울에 한성정부,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특히 임시정부는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3권 분립체제를 갖춘 한국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이와 함께 본격적인 무장독립전쟁이 전개됐으며, 1920년대에 3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이 중국 지린성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킨 봉오동전투,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 정서와 여러 연합부대가 만주 허륭현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킨 청산리전투 등이 대표적인 독립전쟁이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분산돼 있던 무장투쟁 조직을 모아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연합군과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했다. 미국과 협조하여 특수군사훈련을 받은 한국 청년요원들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인이 끈질기게 독립투쟁을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데 힘입어 한민족은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한반도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남과 북에 주둔함으로써 남북으로 분단됐다

 
 
 

한국 소개 - 역사

민주국가, 경제대국으로 발전

 
08-bg.jpg
 

1948년 5월 10일, 유엔감시하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총선이 한반도 남쪽에서 실시되어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이들은 같은 해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7월 20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에게서 가장 존경 받던 독립투사들이었다.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경부고속도로 -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첫 번째 고속도로로 1970년 개통되었다

한편, 소련의 반대로 유엔감시하의 총선이 실시되지 못한 한반도 북쪽에는 그해 9월 9일 공산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고, 소련군 장교였던 김일성이 수반에 취임했다. 남북에 자유민주국가와 공산독재국가가 대립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국내 질서 확립, 일제 잔재 청산, 좌우갈등 극복등 수많은 과제를 안게 됐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 등으로 무장한 북한군이 한반도 전체를 적화하기 위해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략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을 파병해 이를 저지했다. 북한군이 패주하자, 중공군이 개입해 양측 간에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외교적인 노력과 민관의 단합으로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7월 27일 있었던 휴전협정 조인을 극력 반대하며 북진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촉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3년간 계속됐으며, 남북한에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수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고 산업시설이 파괴되면서 대한민국은 세계 최악의 빈곤 국가로 전락했다. 물질적으로는 피폐했지만, 대한민국은 전쟁을 통해서 귀중한 정신적 자산을 얻었다. 바로 자유의 소중함이었다. 자유의 힘은 청년.학생과 젊은 군인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한국 사회를 근대화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고, 1960년 대통령과 부통령선거에서 집권당인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 4·19혁명이 일어났고 진압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곧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라는 권력구조로 헌법이 개정되고,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출범했으나 정치적 갈등과 학생시위 등으로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졌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젊은 장교들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2년여의 군정 후에 치러진 1963년 10월 15일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돼 그해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 아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수출정책으로 고도성장 기반을 구축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지하철 건설 등 본격적인 국토개발을 진행했으며,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빈곤한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국가의 모습을 변모시켰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모범적인 자유민주국가, 경제대국으로 발전해온 과정은 인류역사의 기적으로 불릴만하다.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되었지만 민주화운동은 계속됐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시해라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자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군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5·18민주화운동과 같은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했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안정화에 집중하여 치솟는 물가를 잡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성과를 거뒀다.

1987년 6월 29일 집권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은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특별선언을 발표했으며, 그해 12월 16일 5년 단임제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돼 1988년 2월 25일 취임했다. 노태우 정부는 소련, 중국 및 동유럽 공산권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재임 중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국제연합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 재산등록 및 금융실명제등을 실시하여 부정부패 해소에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의 투명성은 한층 높아졌다. 이와 함께 지방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 지방분권화의 기초를 열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에 노력했다.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햇볕정책’을 내세워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공동성명을 발효했으며, 이후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동해선 연결 등 교류 활성화와 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협력을 확대해 화해·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실현,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건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건설이라는 3대 국정목표의 실현에 집중했다. 2007년 10월 4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한·미 FTA를 타결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 2월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변화와 실용을 바탕으로 ‘선진화 원년’의 신발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부문별 5대 국정지표를 설정했다. 국민을 섬기는 정부를 지향하며 정부조직을 축소·개편하고 공기업 민영화와 효율화, 행정규제 개혁을 단행했다. 21세기의 창조적 한미동맹, 한반도 경제공동체 등을 통하여 글로벌 코리아를 지향했다.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 2017년 5월 취임한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통합’을 강조하며 국정 방향을 탕평과 협치, 개혁과 변화, 대화와 소통, 능력과 전문성으로 제시하였다.

2012년 12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국민행복과 국가발전’이라는 새 시대의 지표를 제시하였던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였다. 또한 ‘창조경제를 구현하는 큰 축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이라고 설명하며 창조경제 실현을 강조했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촛불 혁명의 완성으로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 △더불어 성장으로 함께하는 대한민국 △평화로운 한반도 안전한 대한민국 △지속가능한 사회 활기찬 대한민국 이라는 4대 정책 비전을 제시했다. 이의 실현을 위해 군림하는 문화를 청산하고 국민과 소통하고 민주주의를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사람 중심 경제 구현’을 위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비정규직을 감축했으며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또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의 길을 열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한·미,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으며, 미래 세대를 위해 4차산업혁명 인프라 구축과 규제 개선 및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핵심 기술력 확보하는 등 4대 비전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